더구나 30m 바다 밑 암반에 30m 기초공사를 12㎞나 해내야 하니 이거야말로 난공사 중에 난공사 아니던가? 사실 입찰에서 현대보다 적은 금액을 써내 처음 낙찰되었다가 OSTT에만 한정된 금액으로 써낸 탓에 무효가 되었던 OSTT 공사의 전문기업인 브라운 앤드 루츠사의 입찰금액이 9억 달러인 것만 봐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사우디 왕실, 정주영 남의 종교 귀하게 여기는 인물로 존경
여기서 이후 중동을 내 집 드나들 듯 하였던 정주영이 아랍 쪽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한 번 살펴보자. 사우디아라비아의 알코바와 제다에서 공공주택공사를 입찰할 때의 얘기다. 정주영은 나와프 왕자로부터 정식초청을 받았다. 공항에서부터 왕자가 보낸 왕자 전용차를 타고 왕실로 향했다. 그런데 가는 도중 정주영을 태운 차가 갑자기 멈췄다. 운전사는 깔개를 가지고 내려 메카궁전 쪽을 향해 절을 했다. 이슬람교도들이 성지를 향해 예배를 올리는 살라트(صَلَاة) 시간이었던 것이다. 순간 정주영도 얼른 차에서 내려 깔개도 없는 채 정장 차림 그대로 아스팔트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정주영은 운전사가 “그만 일어나라.”고 할 때까지 계속해서 절을 했다. 그제야 일어선 그의 이마에는 무더위에 녹아내린 아스팔트의 검댕이 묻어 시커멓게 되었고, 얼굴이며 온몸은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잘 국왕이 그에게 종교를 믿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는 특별히 믿는 종교는 없지만 창조주의 존재는 확신한다고 대답했다. 이에 국왕은 웃음을 띠며 “그 신이 바로 알라신이오.”라고 말했는데 정주영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종교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얘기했다.
“그 신을 가리켜 한국에서는 하느님이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천주님, 서양에서는 여호와라고 하는 줄 압니다. 하지만 저는 인간들이 그 신의 이름을 지어 부르는 것은 마치 바벨탑을 쌓아올리고 하늘꼭대기에 오르려던 교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거침없이 말을 하는 정주영에게 다시 국왕이 물었다. “당신이 공항에서 왕실로 오는 길에 우리 아랍사람들과 함께 살라트 시간에 메카궁을 향해 절을 했다고 들었소. 그건 무슨 까닭이오?” 역시 정주영은 기다린 듯 대답을 했다.
“신의 이름이 다르고 믿는 방법은 다르겠지만 아랍인이 믿는 알라신이나 한국의 하느님이나 다 같이 위대한 신입니다. 그런데 남들이 자기 신께 절을 하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은 인간이 취할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정주영이 마음속 깊이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남에 대한 그런 예법은 그가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이 되었을 테고 그것이 바로 아랍 왕실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던 중요한 까닭이었을 게다. 또 그것은 바로 경영의 성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거대한 유조선 정박시설, 울산에서 주베일로 옮겨라
그런데 선수금 2억 달러가 들어온 것을 마냥 기뻐만 할 일은 아니었다. 50만 톤급 유조선 네 대를 동시에 접안할 수 있도록 해상터미널 공사를 해야 하는데 특히 그곳에 시설해야할 어마어마한 규모의 구조물을 어떻게 할 것인지 엄두가 안 나는 일이었다. 콘크리트는 5톤 트럭으로 연 20만 대 분이 동원되어야 하고, 철강재도 1만 톤짜리 배 12척분이 들어가는 규모였다. 철구조물 하나만 해도 가로 18m, 세로 20m, 높이 36m로 무게가 무려 550톤이며, 웬만한 10층 빌딩 정도는 되었다. 이 자켓이 89개가 필요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공기단축을 위해서 울산조선소에서 제작한 뒤 바닷길로 옮겨야만 했다.
그런데 울산에서 주베일까지 뱃길은 1만2000㎞로 경부고속도로로 치면 무려 15번을 왕복하는 거리였다. 아무도 좋은 방법이라고 찬성해주는 이가 없었다. 누가 봐도 무모한 계획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주영은 해내는 사람이었다. 바닷길로 1만2000㎞의 수송작전은 시작되었다. 그것도 무려 19항차. 1항차 바지선 한 척이라도 전복이나 충돌사고라도 나면 정주영의 무모함이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물론 공사 진행에 치명적인 결정타를 맞는 일이었다.
그러나 천우신조(天佑神助)일까? 19항차 가운데 바지선이 다른 배와 충돌해 자켓 파이프 하나가 구부러지는 사고와, 태풍으로 바지선 한 척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사고 등 가벼운 일들 말고는 다행이 전 수송작전은 무사히 끝났다. 어쩌면 이런 수송작전도 정주영의 무모한 결단력이 이루어낸 신기원이 아니었을까?
"현대가 주베일항 공사를 따면 내 팔을 잘라도 좋다." 입찰에 실패한 기업들의 집요한 훼방.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선수금으로 2억 달러 현금수표를 받아낸 것이다. 마냥 기뻐할 일이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구조물을 어떻게 옮길 것인가? 뱃길 1만2000㎞를 15번 왕복하는 '무모한' 수송작전이 시작됐고 수송작전은 무사히 끝났다. 이렇게 정주영과 현대건설은 또 한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호사다마라 할까. 또 다른 위기가 정주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공사 도중 감독관들을 기절하게 하는 일이 또 하나 있었다. 어쩌면 대수송작전 보다 더 어려운 일이 주베일 대역사의 기초공사였는데 자켓 89개를 20m 간격으로 정확히 바다 한 가운데 세운 다음 그 사이를 빔으로 메우는 일이었다. 사실 무게 550톤짜리 자켓을 뭍이 아닌 30m 수심의 바다에 그것도 파도에 흔들리면서 정확하게 설치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