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농부가 칠면조를 키우고 있었다. 친절한 농부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칠면조에게 먹이를 가져다준다. 먹이를 받아먹을 때마다 칠면조는 ‘친구’인 인간이 자신을 위해서 먹이를 제공해 준다고 하는 믿음이 더욱 확고해지게 된다. 그러나 여러분이 예상하는 바와 같이 추수감사절이 되면 그 믿음은 산산조각 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농부는 추수감사절 메인 요리를 식탁에 올려놓기 위해 가차 없이 칠면조를 살육할 테니까.
우리가 초•중•고를 통해 배운 귀납적 지식의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바로 이 예화와 같은 측면이다. 선형적 관계를 전제로 하는 학교와 교과서에 의해 견고히 구축된 지식체계는 세계를 더욱 쉽게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들은 결정적으로 실제 세계를 이해하는 데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 문제다. 어쩌면 그토록 열심히 머릿속에 꾹꾹 몰아넣었던 지식이 어느 순간 최선의 경우에 쓸모없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치명적인 파국을 낳게 될 수도 있다.
인간에게도 앞 세대에게 배운 지식과 기술만으로도 충분히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시대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인간이 교육을 통해 얻은 귀납적 지식만으로 세상과 마주하는 일은 어쩌면 예측 불가능한 바다를 눈감고 건너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이처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우리로 하여금 아프리카 초원의 영양들처럼 대학이라는 한 방향을 향해 돌진하게 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아직도 대학을 갈망하는 이유는 어쩌면 변화무쌍한 바다를 눈 감고 건너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절대 다수의 부질없는 착각에 그칠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인생이라는 격동의 바다를 건너는 데 대학이 매우 쓸모 있는 것이거나 혹은 쓸모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믿음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지속될 것 같다. 그래서 대학은 변해야 한다. 교수들이 터득한 귀납적 지식의 학습장이 아닌 바다를 건너는 데 필요한 지식의 통합과 활용을 목적으로 한 사회 연결망으로 말이다.
[우리는 왜 대학에 가는가] 2편은 다음주에 계속됩니다.
신현정 중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