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자의 겜문학] '페르시아의 왕자'부터 '다키스트 던전'까지

로그라이크, 절망 속 희망을 갈구하다
니체의 영원회귀와 의지에 대해

기사입력 : 2017-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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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이코노믹 신진섭 기자]
뭐가 의미 있나 뭐가 중요하나 정해진 길로 가는데/축 쳐진 내 어깨 위에 나의 눈물샘 위에//그냥 살아야지 저냥 살아야지/죽지 못해 사는 오늘/뒷걸음질만 치다가 벌써 벼랑 끝으로//어차피 인생은 굴러먹다 가는 뜬 구름 같은/질퍽대는 땅바닥 지렁이 같은 걸//그래도 인생은 반짝반짝하는/저기 저 별님 같은 두근대는 내 심장/초인종 같은걸, 인생아.

학교 앞 허름한 술집, 40대 중반의 선배는 부대찌개 전골 옆으로 슬며시 블루투스 스피커를 올려놓더니 이 노래를 틀었습니다. 자신의 ‘최애곡’이랍니다. 옥상달빛의 ‘하드코어 인생아’. 멜로디는 발랄하지만 가사는 음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몇 번이나, 또 몇 번이나 취업 미역국을 마셔대던 후배는 ‘염장 지르냐’고 묻고 싶었습니다만 그윽하게 또 서글프게 잠긴 그의 눈을 보며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가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는 동안 잘나가는 기자인 그에게서 한량(閑良)의 냄새가 풍겼다는 건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왠지 모를 동질감에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었습니다. 인생이 하드코어하다는 건 누구에게나 평등한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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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 장난하냐?" 로그라이크 게임을 즐기는 이 모두 AVGN(앵그리 비디오 게임 너드)가 되는 마법을 경험한다.


‘하드코어 인생아’ 못지 않게 음울한 게임 장르가 있습니다. 바로 ‘로그라이크(Roguelike)’입니다. 무작위로 생성되는 던전(Dungeon), 저장 및 불러오기 기능 없음, 죽음에 대한 막대한 페널티가 특징입니다. 그러다 보니 매판 새롭고 죽도록 어렵습니다. 재밌으려고 하는 게임인데 하다보면 머리털을 쥐어짜고 싶은 심정이 솟구칩니다. 클리어 직전에도 살짝 삐끗하면 수 시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됩니다. 수많은 게이머들이 로그라이크 게임을 하다가 극도한 공허감을 느끼며 ‘현자타임’을 경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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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출시된 롤플레잉 게임(RPG) '로그'. 지금이야 이게 뭐야 싶지만 당시로는 획기적인 그래픽이었다. 로그라이크 게임의 조상님.

로그라이크는 1980년 출시된 롤플레잉 게임(RPG) ‘로그’와 비슷(like)하다는 뜻입니다. 이 게임은 최초의 그래픽 롤플레잉 게임으로 영구적 죽음이라는 개념을 게임사에 등장시켰습니다. 단 한 번의 죽음으로 캐릭터 이용이 불가능한 ‘디아블로’의 하드코어 모드나 ‘리니지’, ‘바람의 나라’ 등의 막대한 사망 패널티 등은 로그라이크류의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됩니다. 기록적인 흥행성적을 거둔 인디게임 ‘아이작의 번제’ 로그라이크류로 분류됩니다. 극악의 난이도로 유명한 ‘다크소울’도 빼놓을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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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몹에게 유저사 사냥당하는 게임 '다크소울'. 유저들은 시도때도 없이 만나는 '유 다이드(YOU DIED)' 문구를 '유다희'양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죽음이 친숙한 게임이다.

제 인생 최초의 로그라이크 게임은 ‘페르시아의 왕자’였습니다. 60분 안에 공주를 구하는 게임인데 흐느적거리는 캐릭터 때문에 골머리를 썩었습니다. 칼날에 베어죽고, 가시에 찔려죽고. 특히나 힘겹게 올라간 탑에서 단 한 번의 실수로 추락할 때에는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사실 이 게임은 중간 저장기능이 있었지만 인터넷도 없던 시대라 알 턱이 없었습니다. 게임 기획 의도보다 수배나 어려운 게임을 플레이하게 된 이윱니다. 가끔은 적보다 공주가 더 원망스러웠습니다. 왜 감금돼도 하필이며 이런 데!



극도로 불친절한 게임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로그라이크를 좋아하는 게이머들의 수는 상당합니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긴장감’과 캐릭터와 나를 동일시하는 ‘몰입감’, 그리고 힘든 게임을 클리어했을 때 느끼는 ‘성취감’이 로그라이크의 매력입니다. 하나의 목숨, 한 번의 기회로 단 한 번의 클리어를 위해 밤새 몰두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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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글자의 이니셜을 새기기 위해 게이머는 그렇게 바쁘게 손을 놀렸나 보다.

특유의 현실감도 재미에 한 몫 합니다. ‘안 먹으면 굶어 죽는다’는 만복도 개념은 끊임없이 유저를 끊임없이 전진하도록 압박합니다. 점수판 기능으로 유저들 사이의 경쟁심을 유발합니다. 높은 점수는 게임이 어려운 게임일수록 가치가 있는 법이니까요. 오락실에서 일면식도 없는 이의 최고 점수를 제치기 위해 동전탑을 쌓아본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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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란 전통적으로 천진난만한 슬라임을 잡으며 차근차근 레벨업을 해 마왕을 무찌른다. 사진=드라마 '용사요시히코의 모험'

지난 2016년 출시된 RPG ‘다키스트 던전’은 여기에 한 술 더 떠 스트레스 개념까지 도입했습니다. 몰락한 가문을 되살리려는 주인공은 모험가들을 모아 ‘가장 어두운 던전(Darkest Dungeon)으로 서서히 내려가게 됩니다. 이 게임은 모험가들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서서히 정신적으로 몰락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 특징입니다. 적의 공격에 맞거나 함정에 걸리면 스트레스 수치가 올라가는데 100이 넘으면 정신 이상 증상을 보이고 최대치인 200을 채우면 심장마비에 걸려 체력이 0이 돼 버립니다. 한 번 죽은 영웅은 다시 되살려낼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강한 영웅이라도 스트레스 관리에 실패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끔찍한 적이 앞에 있더라도, 빈사상태라도 밝고 건강한 모습을 보이는 기존 RPG 영웅들과는 딴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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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침한 성 아래로, 어둠 속을 우울한 모험가들과 함께 탐험하는 게임 다크스트 던전.

그런데 종종, 모험가들이 스스로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통을 극복한 모험가는 던전 공략에 큰 힘이 됩니다. 주변 동료들을 격려하고 스트레스를 줄여주죠. 그래서 그 어떤 능력보다 스트레스에 강한 특성을 가진 모험가들이 선호됩니다. 다키스트 던전에서는 꾸준함이야말로 좋은 모험가의 미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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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사상의 두축인 '영원회귀'와 '의지'. 궁금해도 굳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특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정신이 심히 심난해지는 책이다. 사진=동서문화사

니체는 이 세계가 영원히 반복된다고 말합니다. 그에게는 환생도, 내세도 없습니다. 그저 원을 그리듯 우리는 영원이 같은 점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니체는 미래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세계는 반복되지만 거기엔 어떤 의미도 담겨 있지 않고 텅 비어있을 겁니다. 하지만 니체가 강조하려던 건 ‘허무’가 아니라 ‘긍정’에 가깝습니다. 니체는 오늘을 살라고 합니다. 내일도 별 거 없을 거라고, 이 고단함을 극복하기 위해선 막대한 ‘의지’가 필요하다고. 볕들 날을 기대하지 말고 이 인생의 고비, 스테이지를 넘어가라고. 어차피 기대할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하드코어 인생이니까 조금 호기롭게 살아도 괜찮다고.

인생은 마치 로그라이크 게임 같습니다(Rougelike-like). 살만큼 산 것 같은데 결코 익숙해지지가 않습니다. 적을 물리쳤다고 생각하면 사각(死角)에서 칼이 날아옵니다. 제한시간을 둔 게임처럼 직장에서는 매일 같이 마감에 쫓기고 인생의 적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습니다.

니체는 이 터무니없이 ‘영원회귀’하는 인생에서 의지를 강조합니다. 마치 100번 죽어도 101째를 시도하는 열혈 로그라이크 게이머들처럼. 우리는 이 난관(스테이지)를 클리어 해야만 합니다. 게이머들은 오늘 실패(게임오버)하더라도 내일 성공(클리어)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걸 깨라고 만든 거야?’ 싶지만 끝없는 반복과 인내는 결국 클리어로 게이머들을 안내합니다. 인생이라는 초하드코어 ‘로그라이크’ 게임을 받아든 모든 이들에게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의 플레이가 있길 기원합니다. 하드코어 인생들에게 건투를.


신진섭 기자 jshin@g-enews.com 신진섭 기자가 쓴 기사 바로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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