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니실린의 대중화시대를 연 것은 다름 아닌 화이자였다. 당시 화이자는 구연산 제조에 치중하고 있었다. 설탕을 곰팡이로 발효시켜 그 속에서 구연산을 만들어냈다. 구연산 곰팡이 발효법은 큐리에 박사가 개발한 것이다. 그 박사의 조수 중에 재스퍼 케인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10대 어린 나이에 사환으로 화이자에 발을 들인 케인은 큐리에 박사 조수로 곰팡이 담당이었다. 학구열이 유난히 뛰어났던 케인은 곰팡이를 기르면서 서서히 곰팡이 전문가로 성장해갔다. 뒤늦게 야간으로 블루크린의 폴리테크닉 대학에 진학하여 화학공학으로 박사학위까지 딴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즈음 미국은 2차 대전에 참전하고 있었다. 수많은 군인들이 전선에서 병과 상처로 고통 받고 있었다. 페니실린이 무엇보다도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페니실린 생산량은 너무 적었다. 페니실린으로 인상실험 한 다음 그 환자의 소변에서 다시 그 균을 회수할 정도로 귀했다. 다급해진 미국 정부는 기업에 SOS를 보냈다. 제약회사와 화학회사들에 페니실린 대량생산을 호소하고 나섰다. 물론 현상금도 내걸었다.
바로 이때 화이자의 케인이 나섰다. 딥 발효 공법으로 페니실린을 만들어 보겠다고 제안했다. 화이자 본부에서는 처음에 망설였다. 구연산 생산 차질을 우려했던 것이다. 결국 이사회 투표까지 거친 끝에 한번 시도해보기로 했다. 연구에 착수한 지 4달 만인 1944년 3월1일 케인의 실험은 마침내 성공했다. 화이자의 옛 얼음공장 실험실에서 페니실린이 대량생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은 화이자가 만든 페니실린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여한 병사들에게 보냈다. 페니실린으로 무장한 병사들은 사기충천하여 노르망디를 함락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화이자는 담방 돈방석에 앉았다. 화이자가 일약 세계 최고의 제약업체로 오르는 데에는 페니실린의 공이 자못 지대하다.
화이자는 이 성공을 기반으로 1950년 흙 속에서 테라마이신을 개발해냈다. 전 세계로부터 13만5000개의 흙을 퍼와 그 속에서 발견한 것이다. 땅에서 가져왔다는 의미에서 땅의 영어표현인 테라(Tera)란 말을 넣었다. 폐렴은 물론 백일해 트라코마 발진티푸스 헤르페스 등에 광범위하게 효과를 인정받는 다목적 항생제다. 테라마이신은 화이자 상표로 출시된 첫 의약품이기도하다. 이후에도 디푸루칸 지오펜 유나신 세포비드 설페라존 바이브라마이신 디푸루칸 등을 잇달아 개발해냈다. 우울증 치료제인 졸로푸트, 고혈압치료제인 노바스크와 지스로매르 그리고 고지혈증 치료제인 리피토 등도 화이자가 만들어냈다.
비아그라 개발 과정은 좀 색다르다. 그 원료인 실데나필은 고혈압 치료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임상실험 과정에서 엉뚱한 부작용이 보고됐다. 발기현상이 잇달아 나타난 것. 그 부작용을 놓치지 않고 발기제로 만들어냈다. 우물을 파다 노다지를 캐낸 격이다. 1998년의 일이다. 화이자는 이 비아그라로 벌떡 일어섰다.
김대호 소장/ 경제학 박사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