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향기] 밤꽃 피는 마을에서

기사입력 : 2019-06-12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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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밤꽃이 피었다. 한낮의 후끈한 바람에 실려 오는 알싸한 밤꽃 향기에 어질머리가 일 지경이다. 밤꽃은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는 유월에 핀다. 멀리서 바라보면 나무 전체가 눈을 뒤집어 쓴 듯 온통 하얗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연한 연둣빛이 도는 흰색의 굵은 털실을 묶어 놓은 듯한 밤꽃은 그리 매력적인 꽃은 아니다. 향기는 문을 열게 하고 냄새는 코를 막게 한다는 세간의 떠도는 말을 빌리자면 밤꽃 향기는 오히려 냄새 쪽에 가까울 만큼 짙고 독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나무는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나무 중에 하나다.

어렸을 적 내 고향은 밤나무골로 불렸을 만큼 유독 밤나무가 많았다. 가을이면 장대를 메고 아버지와 뒷동산으로 밤을 따러 다녔다. 아버지가 아름드리 밤나무에 올라 장대로 밤송이를 털면 어린 누이와 밤송이를 줍던 기억은 유년의 흐뭇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꽃보다는 열매가 먼저 떠오르는 밤나무는 참나무과에 속하는 낙엽성 교목으로 잘 자라면 15m까지는 큰다. 뿌리를 깊이 내리므로 어디서나 잘 자라 다른 과일나무에 비해 키우기 쉬운 유실수다. 꽃은 암수한그루로, 수꽃은 꼬리 모양의 긴 꽃이삭에 달리고, 암꽃은 그 밑에 2∼3개가 달린다. 열매는 견과로서 9∼10월에 익으며, 1송이에 1개 또는 3개씩 들어 있다. 밤나무 잎은 참나무 잎과 흡사하여 구분이 쉽지 않은데 자세히 보면 밤나무 잎에는 엽록소가 잎 가장자리의 뾰족한 엽침까지 퍼져있어 잎 전체가 짙은 녹색이지만, 상수리나무의 엽침에는 엽록소가 없기 때문에 색깔로 구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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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나무는 철도 침목으로 많이 쓰이는데 재질이 단단하고 탄성이 좋아 승차감이 좋고 밤나무가 지닌 탄닌 성분 때문에 잘 썩지 않아 다른 나무보다 수명이 길고 따로 방부 처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 경주 천마총 내관의 목책도 밤나무이고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역시 밤나무를 목재로 사용했을 만큼 밤나무는 목재뿐만 아니라 농기구나 각종 기구, 가구재로 쓰임새가 많은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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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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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꽃

하지만 밤나무가 최고의 대접을 받는 이유는 맛있는 밤을 열매로 맺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밤은 영양가가 쌀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각종 비타민을 풍부하게 함유한 대용식량 자원이다. 고슴도치처럼 뾰족한 가시투성이의 밤송이를 벗겨도 밤톨은 다시 겉껍질과 속껍질로 싸여있어 밤 한 톨을 먹기 위해선 많은 수고를 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이 대접 받는 것은 생밤으로 씹어 먹는 식감이 그만이고 삶거나 구워 먹어도 그 맛이 일품이라 그 수고가 아깝지 않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밤은 약밥이나 밤떡, 밤죽이나 밤다식 같은 다양한 요리의 재료로 쓰일 만큼 쓰임새가 많다. 한방에서도 위와 장을 튼튼히 하고 콩팥을 보호하며 혈액 순환을 돕고 지혈에 효과가 있어 설사, 혈변, 구토 증상에 처방되고 몸이 약한 사람의 보양제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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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꽃

대부분의 식물들은 종자에서 싹을 틔우면 종자의 껍질을 밀고 올라오기 마련인데 밤나무는 종자의 껍질이 뿌리와 줄기의 경계에 그대로 달려 있다. 과장일지 모르나 10년, 100년까지 달려 있다고 한다. 옛사람들은 이를 두고 자신의 근본을 잊지 않는 나무로 여겨 후손의 번성과 절개, 그리고 순수한 혈통이라는 의미로 읽어 밤나무를 숭조(崇祖)의 상징목으로 삼았다. 밤송이 하나엔 밤알 세 톨이 들어 있는 게 보통이다. 밤알 세 톨은 삼정승을 의미한다 하여 제사상에 올리거나 혼례를 치르고 폐백을 올릴 때 신부에게 밤을 던져주는 것은 모두 자손이 잘 되길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아카시아 꽃이 지고난 뒤 꽃을 피우는 밤나무는 벌들에겐 꿀을 모을 수 있는 중요한 밀원수(蜜原樹) 중 하나다. 꽃보다는 밤이라는 열매에서 많은 의미를 떠올린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꽃 피지 않고 열매를 맺을 수는 없는 법, 밤꽃 향기 짙게 깔려오는 저녁 어스름, 지금껏 살아온 날들을 가만히 되돌아본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백승훈 기자가 쓴 기사 바로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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